2025 연말정산에서 가장 많이 하는 실수 10가지 (해결 팁 정리)
이순신 탄신 480주년이자 광복 80주년 기념 특별전 <우리들의 이순신>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지난 11월 28일 금요일부터 진행되고 있다.
전시 첫 주인 11월 28일 금요일부터 12월 4일 목요일까지 일주일간 무료 입장 가능하고, 이순신 장군의 노량 해전 전사일인 12월 16일 화요일에도 무료 입장 가능하니 참고하시기 바란다.
<우리들의 이순신>전시는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철저한 대비, 그리고 승리의 바다
2부 시련과 좌절을 넘어서
3부 죽음 성찰
4부 이순신 사후 시대가 기억하는 이름
프롤로그- 해전에서 전사하신만큼 거친 물살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공간으로 꾸며졌다.
이순신 장군은 전쟁에서 죽은 사람뿐 아니라 다친 사람들 이름까지도 모두 기록하여 왕에게 보고하였다. 이순신은 전쟁에 참여한 모든 이들을 신경썼다는 점에서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알 수 있다. 전시 마지막 공간에서는 전쟁에 참여한 모든 이들의 이름을 볼 수 있다.
전시를 열며
국립중앙박물관은 이순신 장군 탄신 480주년과 광복 80주년을 기념하여 특별전 <우리들의 이순신>을 마련하였습니다. 일본의 기습적인 침략으로 시작된 임진왜란이라는 큰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 수군과의 전투에서 한산도·명량·노량에서 큰 승리를 이끈 이순신 장군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7년간의 임진왜란 전쟁이 끝나고 선조임금이 명나라 진린 제독에게 이순신의 인간성에 대해 물었을 때 그는 "이순신은 '경천위지經天緯地'의 능력과 '보천욕일經天緯地'의 공훈이 있는 분"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찢어진 하늘을 꿰매고,
흐린 태양을 목욕시킨 공로가 있는 분입니다."
- 명나라 장수 진린의 말
정조,「어제 이순신신도비」
이순신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뛰어난 장군이기 전에 어떠한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한 성실한 인간의 표상입니다. 이는 전란 중 7년간 꼬박꼬박 써온 『난중일기』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는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이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일기에 "일행 모두가 꽃비에 젖었다"며 여린 서정을 말하기도 했습니다. 막내아들 면의 전사 소식을 들었을 때는 '소금 굽는 강막지의 집으로 갔다'라고 썼습니다. 부하들 앞에서 슬퍼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여염집을 찾아가 맘껏 통곡했을 것입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순신의 이러한 인간적인 모습을 많이 담았습니다. 종가에 전해 내려온 유품들 중에는 아리따운 잔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전쟁 영웅이기 이전에 한 성실한 인간으로써 <우리들의 이순신>을 가슴 깊이 새기는 전시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1부 철저한 대비, 그리고 승리의 바다
Thorough Preparations and the Sea of Victory
곧 전란이 일어날 것이다-전라좌수사 임명
1591년 2월 종6품 정읍현감이었던 이순신은 서애 류성룡이 추천하여 파격적으로 전라좌수사(정3품)에 임명되어 여수의 좌수영에 부임하였습니다.
이순신은 부임하자마자 병력과 전선을 점검하고, 무기와 각종 장비, 성곽과 봉수대를 정비했습니다. 좌수영 앞바다에는 쇠사슬을 걸어 기습에 대비했고, 판옥선을 보수하고 거북선을 새로 만들었습니다. 군사들을 철저하게 훈련하고 백성에게 피해가 없도록 엄히 다스렸습니다.
임진왜란 직전, 이순신은 거북선의 화포 시험까지 마치며 전란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이순신은 이처럼 만약의 사태에 철저하게 대비한 성실한 장수였습니다.
이순신이 받은 사부유서
1591년(선조24) 2월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받을 때 밀부와 함께 받은 명령서이다. 전라좌수사는 전라좌도 수군의 지휘권을 가진 관원이다. 조선시대 지방의 군사권을 가진 관원에게 밀부와 함께 내린 문서라 하여 '사부유서'라고 한다.
비상명령이 있을 때는 왕명과 같이 내려온 밀부와 자신의 밀부를 맞추어 확인한 후 군사를 움직일 수 있었다. 이순신은 이 문서와 함께 제29호 밀부를 받았다.
조선방역지도
<조선방역지도>는 수영과 병영이 표기되어 조선 전기의 해안 방어와 수군 제도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지도이다. 국내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전국 지도이다. 조선의 수군 제도는 태조 때부터 수군호절제사, 청절제사, 방호, 천호로 조직된 지휘 체계가 있었고, 세종 때에는 해안 주요 군현에 수군영이 설치되었다. 수군영은 병선을 배치하여 주변 해역을 방어하는 군기지가 되었다.
<갑옷을 입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초상>은 보통 흰 색의 관복을 입은 모습인데, 위 그림처럼 갑옷을 입은 초상화는 이례적이다. 오른손에는 붉은 털이 달린 지휘용 막대인 사이하이를, 왼손에는 칼을 들고 있으며, 오른쪽에는 투구를 두었다. 갑옷은 그의 처가인 기노시타 가문에 보관되어 온 무구류를 반영한 것으로 보이며, 그림의 위쪽에 1721년 8월 18일 증손 도요토미 슈죠가 지은 찬문이 기록되어 있다.
다양한 형태의 투구를 쓰고 있는 구로다 나가마사와 가신 24인의 초상화
구로다 나가마사와 휘하 24인의 가신을 함께 그린 초상이다. 구로다 나가마사는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제3군을 이끄는 선봉장으로 참전했다. 전국 시대를 거치며 조총 방어에 효과적이면서 제작이 더 간편한 형태로 갑주가 바뀌며 소속부대별로 갑옷의 색상을 통일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지휘관들은 한눈에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개성적인 형태와 장식이 달린 투구를 사용했다. 이순신이 쓴 『난중일기』에는 일본군의 특이하고 위압적인 투구에 백성들이 귀신을 본 듯 놀랐다는 기록이 있다.
분하고 원통하다, 분하고 원통하다. 부산 함락
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이 부산 앞바다에 도착하며 임진왜란이 일어났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란 1년 전부터 규슈의 나고야성에 전진 기지를 두고 전쟁을 준비하여 15만 8천여명의 대군을 조선에 파병하였습니다. 이에 부산진과 동래성이 순식간에 함락되었고 성을 지키던 군사와 백성들은 대부분 전사했습니다.
참혹한 소식을 들은 이순신은 "분하고 원통하다"며 곧바로 전선과 병력을 정비해 출전태세를 갖추었습니다. 그리고 1592년 5월 4일, 이순신의 수군은 첫 격전지인 거제도 옥포 앞바다로 행했습니다.
부산진전투
임진왜란의 첫 전투인 부산진전투를 그린 그림이다. 그림의 왼쪽에는 부산 앞바다에 정박한 일본군의 배와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이 상륙하여 부산진을 향해 진격하는 장면을 그렸고, 오른쪽에는 성벽에서 갑옷 차림의 부산진 청절제사 정발을 중심으로 죽기를 각오하고 대항하는 조선군의 모습을 표현했다.
빽빽하게 그린 일본군의 배, 조총과 칼로 무장한 일본군의 압도적인 숫자가 당시 전력의 격차가 심했음을 실감하게 한다. 부산진은 경상도 해안에 설치된 수군청절제사의 4개 진영 가운데 제 1의 해상관문이었다. 1592년 4월 14일 벌어진 이 전투에서 정발 장군과 부산진의 군사와 백성 대부분이 순절하였다.
1709년(숙종 35) 최초로 그려진 부산진 순절도는 현재 전하지 않는다. 이 그림은 1760년(영조 36) 동래부사 홍명한이 화가 변박에게 당시의 원본을 모사하게 한 그림이다. 이러한 순절도는 역대 동래부사들이 임진왜란을 기억하고 일본에 대한 경계심을 깨우치며 순절자들을 기리기 위해 제작되었다.
동래읍성 출토품
2005년 부산 지하철 공사 과정에서 동래읍성 해자*가 드러났다. 2005~2008년 발굴조사를 통해 다양한 무기류, 인골, 분청사기와 기와편 등이 출토되었다. 출토된 많은 무기들 중 국지창이 유일한 일본 무기라는 점에서 대부분 조선인이 희생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인골이 함께 출토된 것으로 보아 조선인의 시신과 무기를 함께 해자에 버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2005년~2008년 진행된 동래읍성 해자 발굴에서 확인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발굴된 임진왜란 희생 유골 사례이다. 최소 남성 59개체, 여성 21개체, 유아 1개체가 확인되었다. 두개골에 난 손상이 직접적인 사망 원인으로 사망 후 해자에 버려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오른쪽부터 ①이마뼈와 정수리에 절창이 확인된 20대 여성의 두개골
②총이나 활에 의한 관통상이 보이는 두개골
③조총의 탄환이 관통한 흔적이 있는 5세 미만 유아의 두개골
거북선을 만든 것으로 알려진 여주 선소유적에서 출토된 도가니, 철제 못, 목재
여주 선소유적은 조선시대 순천도호부 산하의 선소로 임진왜란 때 전라좌수영 본영 선소, 방답진 선소와 함께 거북선이 건조된 3대 선소 중 하나이다. 이순신이 나대용(1556~1612)에게 일러 거북선을 만들도록 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총 5차례의 발굴 조사 결과 굴강, 세검정, 선소창, 칼과 창을 만들던 대장간 등 유적이 확인되었다. 거북선을 만들고 수리한 것으로 전해진 굴강은 인공적으로 축조된 것으로 내부에 대선은 2~3척, 소선은 3~4척이 머물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발굴조사 때 거북선을 제작했다는 뚜렷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철제 탄환, 철제 못, 소형 목재 등이 출토되어 그 가능성을 추정할 수 있다.
장대가 있는 거북선 그림 귀선도
이순신 종가에 전해 내려오는 거북선 그림이다. 배의 개판 위에 장대를 올리고 돛대 2개를 달아 크게 치장하였다. 배의 좌우에 포구가 각각 10개씩, 노가 각각 8개씩 있다.
돌격하라! 거북선이여! 거북선의 첫 출전
1592년 5월 29일 사천해전에서 거북선이 처음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순신은 거북선을 돌격선으로 삼고 대형 화포인 천지현황의 총통을 쏘아 일본 전선을 격파했습니다. 이어 6월 4일 당항포 해전에서도 거북선이 선두에서 돌진해 조선 수군의 승리를 이끌었습니다.
거북선은 갑판을 덮개로 덮고 그 위에 철촉을 박아 적이 오르지 못하게 했습니다. 사방에서 포를 쏠 수 있었고, 안에서는 밖을 볼 수 있으나 밖에서는 내부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거북선은 조선 수군을 보호하며 적선 사이를 자유롭게 드나들며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일본군은 사방에서 화포를 쏘아도 안이 보이지 않는 거북선을 두려워했습니다.
판옥선은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의 주력 전선이었다. 판옥선은 갑판을 2층 구조로 만들어 하부에는 노를 젓는 노군을, 상부에는 화포와 군사를 배치했다. 상부 갑판에 누각을 올려 장수가 지휘하는 공간인 장대를 만들었다. 배 아래와 뱃전은 모두 소나무로 만들어 선체가 견고하여, 천자·지자·현자·황자·총통과 같은 대형 화포를 실을 수 있었다. 상부 갑판이 높아 화포와 활을 쏘기 유리했다. 배의 아랫부분이 편평한 U자형 평저선으로 속도가 느린 대신 신속한 방향 전환이 가능했다.
일본 수군의 전선, 아타케부네와 세키부네
아타케부네는 일본 수군의 대장선으로, 갑판 위에 집 모양의 누각을 설치했다. 판옥선처럼 갑판이 2층 구조로 되어 있고 크기는 비슷하거나 작았다. 삼나무를 주로 사용하여 선체가 가볍기 때문에 대형 화포를 실을 수 없고 충돌 시 쉽게 격파되었다. 바닥에 뾰족한 첨저선으로 속도가 빠르고 장거리 항해에 유리한 반면 암초가 많은 연안에서 항해나 방향 전환은 불리했다. 세키부네는 일본 수군의 주력 전선으로 아타케부네보다 크기가 작으며 배의 아랫부분이 뾰족한 협저선이다. 세키부네는 빠른 기동력으로 접근하여 상대방의 배에 올라 백병전을 치르기 위해 제작된 전선이었다.
거북선 복원도
영상에 등장하는 거북선의 형태는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서 2022년에 복원한 거북선을 참조한 것이다.
거북선 영상 앞에 앉아서 보시면, 거북선 안에 앉아 있는 듯 저 당시 전쟁 상황을 잠시 느껴보실 수 있다.
이순신과 조선 수군의 무기 운용
"거북선이 먼저 돌진하고 판옥선이 뒤따라 진격하여 연이어 지자와 현자 총통을 쏘고
또 포환과 돌·화살을 빗발이나 우박 퍼붓듯 하면 적의 사기가 이미 꺾이어
물에 빠져 죽기에 바쁘니 이것은 해전의 쉬운 점입니다."
『임진장초』1593년 9월
이순신과 조선 수군은 임진왜란 당시 해전에서 일본군의 조총과 백병전에 맞서 화포 중심의 전투 방식을 확립하였습니다. 이순신은 대형 화살인 대장군전·장군전을 천자·치자 총통으로 발사해 나무로 만든 적선을 깨부수는 '당파'전술을 사용했습니다. 거북선이 선두에서 적의 지휘선을 향해 돌진해 근접 사격을 가하면, 판옥선들이 뒤이어 각종 총통과 화살을 발사해 적군을 무찌르고, 마지막에는 화공으로 적선을 불태우며 전투를 마무리 지었습니다.
일본군의 조총은 육지에서는 위력적이었지만 바다의 흔들리는 배 위에서는 효과적인 공격 수단이 아니었습니다. 일본 수군의 배는 가볍고 바닥이 뾰족해 빠르지만 충격에 약했습니다. 반면 조선 수군은 대형 화포의 화력과 신속한 방향 전환이 가능한 판옥선, 적진을 종횡무진 누빌 수 있는 거북선을 바탕으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조선 수군의 무기들
이순신이 임진왜란 중 전투 경과와 여러 군사 업무에 대해 보고한 글을 모은 책『임진장초』
1592년(선조 25) 4월 15일부터 1594년(선조 27) 1월 17일까지 이순신이 약 2년간 올린 보고서를 후대에 다른 사람이 옮겨 적어 책으로 묶었다. 선조와 세자(훗날 광해군)에게 올린 공식 문서를 후대에 필사해 묶은 책이다. 임진왜란이 시작된 1592년에는 주로 초기 출전의 승전 보고가, 강화 협상이 시작된 1593년 이후에는 군사와 행정 보고가 중심을 이룬다. 전투 후 올린 장계에서 전공자, 전사자, 부상자를 빠짐없이 기록하고 1·2·3등으로 나누어 상을 청하였고, 피란민들의 생계와 군량 확보를 위해 둔전 경영을 허락해달라고 청하였다. 그 외에도 전투 상황, 군사 운영, 수군 진영의 현황, 인사와 상벌, 군량 조달, 무기 개발, 피란민 대책 등 국가적 사안에 대한 내용과 이에 대한 이순신의 소신이 잘 정리되어 있다.
"신(이순신)이 피란민들이 들어가 살 만한 곳을 생각해 보니,
여수의 돌산도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이 섬은 본영(전라 좌수영)과 방탑 사이에 있으면서,
봉우리로 겹겹이 둘러싸여 적이 들어올 길이 사방으로 막혔고,
땅은 넓고 평평하며 흙은 비옥합니다.
그래서 떠도는 백성들을 알아듣게 타일러 차츰 들어가 살게 하여,
방금 봄갈이를 시켰습니다."
『임진장초』1593년 1월 26일 장계
이순신의 장계를 베껴 쓴 책『충민공계초』
이순신의 장계를 후대에 베껴 쓴 다양한 이본 중 하나이다. 책 끝에 '강희 원년 임인(1662) 3월 쓰기를 마쳤다'라는 기록이 있어 필사 연도를 알 수 있다. 1592년 4월 15일부터 1594년 4월 20일까지 총 68편의 장계가 수록되어 있다.
『임진장초』는 개별 장계마다 문서의 형식을 갖추었는데, 이 책에서는 맨 앞의 장계만 형식을 갖추고 나머지 장계는 본문만 필사하였다. 제목의 '충민공'은 이순신이 전사하자마자 백성들이 힘을 모아 세운 사당인 충민사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1643년(인조 21)에 충무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기 전까지 이순신을 의미하는 명칭 중 하나가 되었다.
선조가 이순신과 군사들에게 음식을 베풀며 내린 문서
1596년(선조 29) 9월 선조가 통제사 이하 각 진의 군사들에게 병조 좌랑을 보내 상을 주고 잔치를 베풀며 노고를 위로하는 문서이다. 이 교서에서 선조는 변방을 든든히 하고 나라 안을 편안하게 한 것은 이순신과 수군이 용맹하게 지켰기 때문이라고 칭찬하면서 그에 걸맞은 처우를 해주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 부끄러움을 표했다.
이 교서가 내려질 무렵, 명과 일본의 강화 협상이 결렬되었다. 전쟁의 휴지기가 끝나가던 시점에서 이순신과 수군의 역할이 다시 한 번 주목받을 때였다.
"가을 바람이 점점 더 차가워지는데
바다는 더 추울 것이다.
너희는 마땅히 입을 옷이 없는데
나만 따뜻하게 입는 것이 부끄럽구나.
아! 너희들은 배고프고 목마른데
나만 진수성찬을 먹으면 어찌 편안하겠는가!
이에 특별히 도감낭청 병조좌랑 최동립을 보내어
음식을 먹이고 상을 주는 은혜(호상)를 베풀어
위로하고 타이르는 특전을 내린다."
「선조가 이순신과 군사들에게 음식을 베풀며 내린 문서」
한산도 대첩
단 한 척의 배도 돌려보내지 않겠다
1592년 7월 이순신은 한산도 앞바다의 좁고 험한 건내량에 숨어 있던 일본군을 넓은 바다로 유인해 학익진을 펼쳐 격파했습니다. 학익진은 학이 날개를 펼친 듯 적을 포위하기 위한 전술 진형입니다. 한산도대첩 외에 다른 해전에서도 종종 사용되었습니다.
이 승리는 수군의 철저한 훈련, 거북선과 판옥선, 대형 화포의 막강한 화력, 지형에 맞춘 진법 운용, 그리고 이순신의 치밀한 전략이 어우러진 결과였습니다.
한산도대첩은 조선 수군이 거둔 첫 전면전 승리로 남해에서 해상 주도권을 잡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승리로 조선 수군은 일본의 서해 진출을 막고 보급로를 차단해 일본군의 육상 전력에도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현덕승에게 한산도로 진을 옮긴 이유를 설명하는 편지
이순신이 한산도로 진을 옮긴 다음 날, 1593년(선조 26) 7월 16일 현덕승(1564~1627)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순신은 이 편지에서 호남은 국가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이므로 한산도에 나아가 진을 치고 바닷길을 끊고 일본 수군을 저지할 계획임을 밝혔다. 이 외에도 편지에 일상의 안부와 선물에 대한 감사를 전하면서도 전란을 걱정하는 간절한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이 서간첩은 이순신의 외가쪽 친척으로 추정되는 현건과 현덕승, 조카에게 보낸 이순신의 편지 7통과 큰아들 이희(1567~1625)가 현건에게 보낸 편지 1통을 함께 엮은 것이다. 이순신의 10세손인 이규대가 서간첩을 만든 경위를 기록한 글이 수록되어 있다.
류성룡 갑옷과 투구
류성룡(1542~1607)이 입었던 갑옷의 잔편과 투구이다. 돼지가죽미늘에 사슴가죽끈을 엮어 만들었다. 가죽을 직사각형으로 자르고 가장자리를 둥글린 후 바깥쪽에서 흑칠을 하였다. 투구는 챙이 붙은 원뿔 모양의 모자 테두리에 쇠미늘을 엮어 만든 볼가리개와 뒷가리개로 구성되어 있다. 이순신도 이와 같은 형태의 갑옷과 투구를 입었을 가능성이 있다.
류성룡은 임진왜란 때 도체찰사로써 내정과 군사업무를 총괄하였다. 특히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 1591년 이순신을 조정에 추천하여 전라 좌수사에 임명되도록 한 것은 그의 공이었다.
조선시대 수군이 사용한 무기들
석자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가 두려워 떨고
三尺誓天 山河動色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산하를 물들이도다
一揮掃蕩 血染山河
이 칼이 만들어진 1594년은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 교섭이 진행되던 때로, 이순신은 정유재란 직전인 1597년 2월까지 삼도수군통제사로 한산도에서 군영을 다스렸다. 오랫동안 이어진 전쟁, 전염병과 기근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고 있었다. 이순신 장검 두 자루의 칼날에 새겨진 글귀에는 이러한 시련의 시기에 자신의 마음을 다잡고 반드시 백성들과 나라를 지켜내겠다는 맹세의 의미가 담겨 있다.
2미터에 가까운 길이와 고급스러운 장식 문양으로 보아 실제 전투에서 사용했다기보다는 삼도수군통제사로써의 위엄을 드러내는 의장용일 가능성이 높다. 최고의 재료와 기량으로 만들어 지금도 상태가좋다. 칼자루는 조선 환도의 형식이고, 칼날과 코등이 장식은 외래적 양식을 보이며, 칼날에 장식된 입사의 방식과 문양은 조선의 공예적 요소를 결합한 것이다. 조선 도검의 형식에 일부 외래적 요소가 수용되고, 토착되어 조선식으로 새롭게 변화한 조선의 대표적인 칼이다.
이순신의 마음을 담은 기록, 『난중일기』
『난중일기』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부터 노량해전이 있던 1598년까지, 이순신이 남긴 7년의 기록을 이르는 말이다. 오늘날 전해지는 일기는 크게 세 갈래다. 전란 중에 직접 쓴 친필본, 정조 대에 간행된 『이충무공전서』의 「난중일기」, 후손이 발췌해 옮겨 쓴 『충무공가승』의 「일기초」가 있다. 그 중 1595년 을미년의 일기는 친필본에 빠져 있지만 전서본과 「일기초」에 남아 있다.
이순신은 7년 동안 거의 빠짐없이 성실하게 일기를 썼다. 『난중일기』에는 전투와 군영 경영과 같은 공적인 내용도 있지만, 소소한 일상의 기록부터 선물 목록, 장계나 전쟁을 연습한 흔적도 남아 있다.
난중일기 친필본
이순신이 직접 쓴 난중일기 친필본이다. 일기가 작성된 연도에 따라 '임진일기''정유일기'와 같이 표지에 이름을 붙였는데, 정조(제위 1776~1800)의 명으로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할 때 '난중일기'라는 이름을 붙여 수록하면서부터 그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1. 임진일기 壬辰日記
2. 계사일기 癸巳日記
3. 갑오일기 甲午日記
4. 병신일기 丙申日記
5. 정유일기 丁酉日記
6. (속)정유일기 (續)丁酉日記
7. 무술일기 戊戌日記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난중일기』 1597년 9월 15일
"살아남기조차 힘든 순간에,
이순신 장군은 '자신의 일'을 왜 기록했을까요?"
명량대첩
물러나 피한들 살 수 있겠느냐!
1597년 7월, 칠천량해전으로 원균이 이끈 조선 수군이 거의 궤멸하자 이순신은 또다시 통곡했습니다. 선조는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습니다. 임명장에 선조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는 뜻이 담겨 있었습니다.
선조는 12척만 남은 수군으로는 일본 수군을 대항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수군을 포기하고 육군에 편입시키려 했습니다. 그러자 이순신은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라며 수군을 지켰습니다.
이순신은 수군을 모으고 전선을 수습한 뒤 또 한 척을 더하여 9월 16일, 진도 앞바다 울돌목(명량)에서 일본 전선 133척을 맞아 싸웠습니다.
이순신은 절대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조수의 변화를 이용하여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 승리는 일본군의 서해 진출을 막고 조선 수군을 재건하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명량대첩 후 이순신은 보화도에 이어 고금도로 옮겨 수군을 재정비했습니다. 1598년 8월, 진린 제독이 이끄는 명나라의 수군이 고금도로 합류하자 조·명 연합군으로 일본과 대적하게 되었습니다.
기복수직교서
칠천량해전 후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하며 내린 문서이다. '기복(起復)'이란 '기복출사(起復出仕)'의 준말로, 나라의 필요에 의하여 부모상을 당하여 휴직 중인 관료에게 상복을 벗고 벼슬자리로 나오게 하는 일을 뜻한다. 당시 이순신은 모친상 중이었다. 선조는 이 교서에서 임진년부터 큰 공을 세운 이순신을 파직하고 백의종군하게 한 것은 자신의 잘못임을 인정하고, 다시 충청·전라·경상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면서 또 한 번 나라를 구해주기를 당부했다. 국왕이 신하에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내용의 교서는 매우 드문데, 그만큼 당시의 전황이 다급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부유서-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받으며 밀부와 함께 받은 문서
1597년(선조 30) 7월 23일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에 다시 임명되면서 받은 유서이다. 지방의 군사 지휘권을 가진 관직에 임명될 때에는 반드시 유서와 함께 밀부를 받는다. 이순신은 칠천량해전으로 흩어진 조선 수군을 수습하기 위하여 남해안 연안을 가던 중, 8월 3일 경상도 진주 수곡에서 이 유서와 「기복수직교서」를 함께 받았다. 이순신은 교서를 받기 전날 밤, 임금의 명령을 받을 징조가 있는 꿈을 꾸었다고 『난중일기』에 적었다.
"잠깐 맑았다. 홀로 군 복무하며 지내는 집에 앉아 있었다.
사무치게 그리운 마음을 어찌하랴. 슬프고 서러운 마음이 끝없다.
이날 밤 꿈에서 임금님의 명령을 받을 조짐이 있었다."
『난중일기- 정유일기』, 1597년 8월 2일
복숭아 모양 잔과 받침
이순신 종가에 전하는 복숭아 모양의 잔과 받침이다. 『난중일기』친필본 중 무술일기에 명나라 장수들로부터 받은 선물 목록이 적혀 있는데, 그중 파총 진국경이 선물한 '화주배 한 쌍'이 바로 이 술잔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얇은 구리판에 도금하여 만든 것인데, 지금은 손잡이 부분의 나무 줄기와 잎 등 일부에만 도금이 남아 있다.
갓 위에 다는 옥장식, 조선 시대 16세기
이순신의 유품으로 종가에 전하는 갓 장식이다. 옥로는 고관이나 외국에 가는 사신이 쓰는 갓 위에 달던 것으로 옥으로 해오라기 모양을 만들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둥근 금동 받침 위에 연꽃잎에 싸여있는 3마리의 해오라기가 조각되어 있다.
진린이 이순신 등의 전공을 아뢰는 문서
이순신과 함께 참전한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이 선조에게 이순신의 전공에 대해 상찬한 내용을 담은 문서이다. 진린은 이순신에 대해 "찢어진 하늘을 꿰매고 흐린 태양을 목욕시킨 공"이 있다고 극찬했다.
진린은 1598년(선조 31) 고금도에 합류하여 이순신과 함께 조명연합수군을 이끌고 노량해전에 참전했다. 이 글이 실린 「사대문궤」는 1592년(선조 25)부터 1609년(광해군 1)까지 명과의 외교문서를 모아 편찬한 책이다.
노량대첩
이 원수를 무찌를 수만 있다면-노량의 별
명량해전 이후 일본군은 순천·사천·울산 등에 왜성을 쌓고 장기 주둔했습니다. 1598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일본군은 철수를 준비했습니다. 이에 조·명 연합군의 육군과 수군이 네 방향에서 일본군을 압박하며 울산왜성·사천왜성·순천왜성을 공격했으나 큰 피해 속에 결론을 내지 못했습니다.
이순신과 진린의 조·명 연합군은 순천왜성에 고립된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하려는 일본군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노량에서 결전을 준비했습니다. 11월 19일, 조·명 연합군은 마침내 일본 수군을 크게 격파했습니다. 그러나 이순신은 이 전투에서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했습니다. 노량해전은 필사적으로 퇴각하던 일본군을 상대로 한 마지막 대규모 해전이자, 이순신이 생애를 마감한 결전이었습니다.
별양자총통은 총신의 길이가 평균 76cm로 승자총통에 비해 길게 계량된 개인화기이다. 조선은 승자총통보다 더 빠르고 정확하고 더 멀리 탄환을 발사할 수 있는 총통을 만들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별양자총통과 별승자총통은 총신의 길이를 늘려 사정거리를 개선한 사례이다.
- 노량 해역에서 출수된 지자총통 파편 3번
노량 해전의 해역 인근 전라남도 백도 근처에서 출수된 지자총통의 파편이다. 백도 주변은 다양한 무기류가 가장 많이 인양된 곳이다. 백도는 순천왜성에서 여수와 남해도 사이를 지나 남해도 남쪽의 외해로 가는 길목에 있는 섬이다. 노량 해협이 봉쇄된 상황에서 고니시 유키나가(1558~1600)의 군대가 도주한 경로로 추정된다.
이 지자총통의 파편들은 전투 중 발사과정에서 파열되어 분리된 것으로, 원래는 동일 개체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노량 해전 당시 도망가는 일본 수군을 추격하는 전투에서 수몰된 것으로 보인다.
명량·노량 해전지도(1597~1598)
일본군의 물리친 공적을 기념하는 내용의 병풍 그림
정유재란 때 명군이 일본군을 물리친 공을 기념하여 제작된 <정왜기공도권(征倭紀功圖券)>을 바탕으로 후대에 제작된 병풍 그림이다.(어찌된 연유에서인지 몰라도 일본이 명나라군의 시각에서 전쟁에 이긴 공을 기념하여 제작된 그림이다.) 중국에서 그린 원본을 19세기에 일본에서 모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1. 정왜기공도병 전반부
<정왜기공도병>의 전반부, 첫번째 병풍이다. 명의 육군과 수군의 출전, 조선에서의 환영, 출정 전 서약, 율림전투 등이 묘사되어 있다. 이 병풍은 스웨덴의 구스타프 오스카 발렌버그(1863~1937)가 1906년 도쿄 특사에 임명되었을 때 구입했는데, 그의 딸이 스톡홀름 동아시아 박물관에 기증하였다.
2. 정왜기공도병 후반부
<정왜기공도병>의 후반부, 두번째 병풍이다. 이순신이 전사한 노량해전, 순천왜성전투, 남해도 소탕작전 등 정유재란의 마지막에 해당되는 전투 장면이 담겼다. 국립중앙박물관이 2012년 영국에서 구입하였다.
이 두 그림이 한 작품으로 처음 소개되는 자리가 바로 이 <우리들의 이순신> 전시이다.
울산왜성전투를 그린 병풍
1597년(선조 30) 12월 2일부터 1598년(선조 31) 1월 4일까지 울산왜성에서 벌어진 조·명 연합군과 일본군간의 전투를 그린 그림으로 병풍 3틀로 이루어져 있다. 임진왜란에 참전한 사가 지역의 다이묘 나베시마 나오시게(1538~1618) 가문에 전한다.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귀국한 후 제작한 원본은 1874년에 소실되었고, 현전하는 그림은 나베시마 가문에 있던 다른 사본을 토대로 1886년에 묘사한 것이다. 나베시마 가문에서는 울산왜성전투를 그림으로 남겨 전장에서의 무공을 후대에 전하여 가문과 가신 간의 유대를 강화하고자 했다. 울산왜성전투로 일본군과 조·명 연합군 양측 모두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일본군 내에서 전선 축소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참고- <울산왜성전투도>의 전시 기간은 11월 28일부터 12월 30일까지이다.
"이순신 장군이 끝까지 지키려고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3. 바다의 끝에서 나를 돌아보라
Looking Back on My Life at the End of the Sea
노량의 전투가 끝나고 파도는 고요를 되찾았습니다. 몸은 바다에 묻혔으나 나는 아직 잠들지 못했습니다. 바다의 끝에서 나는 조용히 지나온 길을 돌아봅니다.
나는 한성의 문신 집안에서 태어나 글과 예법을 익혔으나, 스물 두 살 무렵 활과 무예로 나라를 지키기로 했습니다. 그 결심이 결국 나를 만들었습니다. 청탁과 아첨을 멀리하며 불의에 물들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 올곧음이 나를 외롭게 했으나 그 외로움이 나를 더욱 굳게 했습니다.
무과에 급제해 함경도 변방에서 국경을 지켰습니다. 두만강 녹둔도에서 여진족의 기습을 받아 최선을 다해 싸웠으나 패전의 책임을 지며 백의종군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나는 여진족의 거점을 토벌하는 전투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습니다.
그러고 나서 고을 수령이 되어 목민관으로 소임을 다하였고 전쟁이 나를 부를 때 나는 이미 마음의 준비를 다 끝내고 있었습니다.
1576년(선조 9) 식년시 합격자 명단이다. 무과 합격자 중 이순신의 이름이 보인다. 그 아래로 이순신의 자와 본관, 이름, 거주지, 부모 및 형제에 대한 정보가 함께 적혀있다.
이순신 무과급제 교지
1576년(선조 9) 식년시 무과 시험에서 병과 4등으로 급제한 사실을 알리는 문서이다.
이순신이 과거에 급제한 것을 축하하며 어머니 초계 변씨가 이순신에게 노비, 토지와 집을 나누어준 사실을 적은 문서이다. 더불어 이전에 이순신의 형과 동생에게 증여한 재산의 구체적인 내역도 다시 확실하게 밝혔다. 원래 문서는 1584년(선조 17) 화재로 불타버려서 1588년(선조 21)에 다시 작성한 것이다. 문서에 보이는 노비는 총 22명으로 전국에 흩어져 있으며, 노비와 함께 토지도 나누어준 것으로 미루어 이순신 집안의 재산 규모를 엿볼 수 있다.
류성룡의 임진왜란 회고록 『징비록』
류성룡(1542~1607)은 임진왜란 때 영의정과 도체찰사를 맡아 내정과 군무를 총괄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임진왜란의 전말과 당시 자신의 경험을 정리하기 시작하여 1604년(선조 37) 『징비록』을 집필하였다. '징비'는 중국 시경의 "지난 일을 징계하여 후환을 삼가다"라는 말에서 딴 것이다.
이 책에서 류성룡은 임진왜란을 끝낸 공로는 이순신과 조선 수군에게 있음을 분명히 하였고, 이순신을 천거한 본인의 역할도 강조하였다. 『징비록』은 17세기에 일본으로 전해져 일본 내에서 간행되어 널리 읽혔고, 이어 중국에도 알려져 동아시아 삼국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순신의 전기 중 가장 오래된 단행본
『충무록』은 이순신의 조카 이분(1566~1619)이 기록한 이순신의 전기 「행장」과 이식(1584~1647)이 이순신의 시호를 받기 위해 지어 올린 「시장」 두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분이 기록한 「행장」의 원본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충무공가승』(1716년)과 『이충무공전서』(1795년)에 수록되어 전한다. 『충무록』내「행장」이 현존하는 이분의 「행장」간행본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분의 「행장」에는 이순신의 일대기를 소개하기에 앞서 그의 관직명과 그의 세계(世系)가 나오고, 어렸을 적 참외밭 주인의 밭을 망친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충무공가승』부터 초기「행장」을 개정하면서 점차 어린 시절의 비화같은 다소 소소한 이야기들은 없어지고, 영웅성과 애국심이 드러나는 글들이 보강되었다. 특히 『충무공가승』과 『이충무공전서』를 통해 널리 알려진 이순신의 마지막 말인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는 『충무록』내「행장」에 보이지 않는다.
4. 시대가 부른 이름
Name Remembered by History
나라를 구한 충신
이순신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전적지와 연고지에 사당과 기념비가 세워졌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조선왕실은 이순신을 선무일등공신에 책봉했습니다. 여수를 시작으로 여러 지역 백성들이 청원하여 그의 기념비를 세웠고, 그의 부하장수들은 타루비(墮淚碑)를 세워 그를 기렸습니다.
인조는 시호 '충무(忠武)'를 내리고, 숙종은 아산 현충사에 사액을 내려 국가의 차원에서 추모했습니다. 영조는 아산의 이순신 종가를 중심으로 사적을 정비하고 그의 후손을 예우했습니다. 정조는 본격적으로 이순신을 나라의 영웅으로 받들었습니다. 이순신을 영의정에 추증하고 친히 <충무공 이순신 신도비명>을 지었으며, 『이충무공전서』를 간행해 그의 생애와 업적을 왕조가 공인한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이리하여 이순신은 한 시대의 영웅을 넘어, 조선 왕조가 대를 이어 기린 충신의 표상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통제이공수군대첩비
이순신을 기리며 전라좌수영에 세운 비석의 탁본
이순신의 공을 기리기 위해 전라 좌수영이 있었던 전라남도 여수에 1620년(광해군 12)에 건립한 '통제이공수군대첩비'를 탁본한 것이다. 통제이공수군대첩비는 이순신 관련비 중에서 가장 큰 지대석과 귀부, 용무늬 이수를 갖추고 있다. 전액 통제이공수군대첩비는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김상용(1561~1637)이 썼다. 비문은 당시의 문장가인 이항복(1556~1618)이 짓고, 글씨는 명필로 이름을 날리던 김현성(1542~1621)이 썼다. 임진왜란 때 한산도, 노량, 명량 세 곳을 막아낸 이순신의 위업을 기리는 내용이다.
통제이공수군대첩비 옆에는 이 비의 건립 경위를 기록하기 위해 1698년(숙종 24)에 건립한 동령소갈비가 있다. 동령소갈비의 반대편에는 1603년(선조 36)에 세운 타루비가 있다. 타루비(墮淚碑)는 '눈물을 흘리며 바라보는 비'라는 의미로 전라좌수영의 군인들이 이순신을 추모하여 세운 것이다. 이 비는 일제강점기 말 반일내용이 담긴 고적들을 철거한다는 정책에 따라 조선총독부의 명령으로 1942년에 명량대첩비와 타루비와 함께 서울로 옮겨져 경복궁 근정전 앞뜰에 버려져 있었다. 광복 이후 발견되어 여수 읍사무소에 임시로 두었다가, 1947년 이충무공과 연관된 고소대에 비각을 세워 동령소갈비, 타루비와 함께 안치되었다.
이순신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우리 군사와 명나라 군사들이 모두 통곡하였으니,
마치 자기 부모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것 같았다.
이순신의 주검을 넣은 관이 지나는 곳곳의 백성들은
제사를 지내는 제단을 차렸고, 상여를 막으면서
"참으로 공께서 우리를 살렸는데, 지금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십니까!"
라며 통곡하니, 길이 막혀서 상여가 나아가지 못하였다.
길가는 사람들도 모두 통곡하였다.
『징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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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4년(선조 37) 이순신을 선무공신에 봉하며 내린 교서이다. 이순신은 권율, 원균과 함께 일등공신에 녹훈되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앞에 기록되었다. 교서에는 이순신이 무과에 급제한 후 함경도 건원보 권관으로 여진족 울지내를 사로잡은 일, 녹둔도에서 오랑캐를 물리쳤으나 억울하게 백의종군을 하였던 일, 정읍현감을 거쳐 전라좌수사가 되기까지의 공을 모두 적었다.
선조(재위 1567~1608)는 교서에서 이순신을 통제사에서 파직한 것에 대해 조정의 계책이 잘못되었고 곧은 충신을 저버린 것이 부끄러웠다고 하였다.
이순신 집안에 노비를 내리는 문서
이순신을 공신으로 녹훈한 이듬해 1605년(선조 38) 노비를 지급하면서 함께 내린 교지이다. 조선시대에는 공신이 되면 공신교서 또는 녹권을 주고, 초상화를 그려주는 은전을 내렸다. 또한 부모와 부인의 품계를 올려주고, 후손들에게도 사면의 혜택을 주었으며, 노비와 전답 등 경제적인 혜택도 내렸다.
이순신은 선무공신 1등에 녹훈되어 노비 13구, 전지 150결, 은자 100냥, 옷감 1단, 말 1필을 하사받았다. 그러나 전란으로 인해 물자가 부족했던지 바로 지급하지 못하고, 이듬해 노비 13구 중 8구만 우선 하사하였다. 이때 하사한 노비들은 전라도 부안, 충청도 온양·직산·천안·은진 등 인근 지역의 관노와 관비였다.
상주 방씨 정경부인 교지
1598년(선조 31)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순신이 우의정으로 증직됨에 따라 5년 후인 1603년(선조 36) 이순신의 부인 상주 방씨 또한 정경부인의 작호를 받았다. '정경부인'은 정1품과 종1품 관원의 정실부인에게 내려진다. 이순신은 우의정으로 추증될 때 가장 높은 품계인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에 봉해졌기 때문에 방씨 또한 외명부에서 제일 높은 품계인 '정경부인' 작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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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4년(선조 37) 이순신을 선무일등공신에 녹훈할 때 좌의정으로 추증하면서 내린 교지이다. 이순신은 전사한 직후인 1598년(선조 31) 12월 우의정에 추증되었는데, 이때 다시 좌의정으로 증직되었고, 정1품 공신에게 내려지는 부원군(府院君) 칭호도 함께 받았다. 부원군 봉호는 덕수 이씨의 관향 경기도 개풍군 덕수리(지금의 개성시 판문군 덕수리)를 따라 '덕풍(德豊)'으로 정했다.
왕명으로 편찬한 이순신의 문집-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정조의 명으로 이순신에 관한 각종 기록들을 모아 1795년(정조 19) 규장각에 15권 8책으로 구성된 이순신의 문집이다. 검교 유득공이 감독하여 을묘자를 간행하였으며, 이때 정조가 왕실의 내탕금*을 내려주기도 했다.
권수에 정조의 윤음과 신도비명을 시작으로 이순신이 임진왜란 때 받은 교서와 유지, 역대 임금이 내린 제문, 통제영과 전라좌수영의 거북선 그림 해설, 그리고 이순신의 세보와 연표 등이 실려 있다. 이어 권1에서 권14까지 이순신이 직접 쓴 시와 여러 편지글, 장계, 『난중일기』와 「행록」, 「행장」, 비문·기문·제문, 국내외 전적에서 뽑은 각종 관련 기록들이 담겨 있다.
국가 주도하여 개인 문집을 간행한 대표적인 사례이자 공인된 이순신의 자료로써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9세기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순신 관련 저작의 원천이 되고 있다.
*내탕금- 조선시대 왕실의 사유재산으로 임금이 개인적으로 쓸 수 있는 돈
후손들이 이순신의 글과 관련 기록을 모아 편집한 책-『충무공가승』
집안에 전해 내려오던 이순신의 글과 관련 기록을 모아 이순신의 4세손인 이홍의가 주도해 편집하고 조카인 5세손 이봉상이 1715년 경에 간행하였다. 『충무공가승』에 이순신의 글은 글 5편과 시 4수뿐이고, 그 외에는 최유해가 지은 「행장」, 이식이 지은 「시장」, 김육이 지은 「신도비명」과 같은 이순신의 전기와 「충민사기」와 같은 각종 사적의 기록, 이순신의 조카 이분이 지은 행록, 이순신과 관련하여 다른 사람들이 쓴 상소나 제문 등이 포함되었다. 『충무공가승』은 숙종 때 이순신 현창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였고, 1795년 정조의 명령으로 편찬된 『이충무공전서』의 기본 자료가 되었다.
삼도수군통제사의 상징이 된 여덟가지 물건, 팔사품(八賜品)
이순신의 전공이 명나라에까지 알려져 명나라 조정으로부터 받았다고 전해지는 여덟가지 의장물이다. 도독인·영패·귀도·참도·곡나팔·독정기·홍소령기·남소령기로 구성되어 있다.
팔사품(八賜品)은 조선 후기에 통제영에서 이루어지는 수군 조련 때 삼도수군통제사가 타는 대장선에 배치되었다. 또, 통제영에서 이순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에도 사용되었다. 즉, 팔사품은 조선 후기 내내 삼도수군통제사의 상징물이자 이순신을 기리는 기념물로 인식되었다.
①도독인: 구리 재질로 만든 대형 도장. 조선 후기 수군 통제사를 상징하는 도장으로 여겨졌다. 제일 왼쪽 상자는 '황조도독인'이라 쓰여진 도독인을 보관하는 함이다. 사진의 중간에 자리한 사각형 물품이 대형 도장인 도독인이다. (사진 왼쪽에서 두번째)
②영패: 군령을 전할 때 사용한 팔각형의 나무패. 주머니에 그려진 표범 문양 때문에 호두령패라고도 한다.
③④: 군대의 명령을 전달할 때 사용하는 의장물이다.
⑤곡나팔: 구리로 만든, 목이 구부러진 형태의 나팔이다.
⑥독전기: 전투를 독려할 때 사용하는 깃발. '군사가 적을 만났을 때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는 처단한다.'라는 문구가 있다.
⑦귀도: 칼자루에 용의 머리를 새기고 그 위에는 귀신의 머리를 조각하고 붉은 색을 칠한 의장물이다.
⑧참도: 칼자루는 상어껍질로 싸고 칼집은 은도금한 쇠로 장식한 의장용 칼이다.
(왼)이광수가 동아일보에 연재한 이순신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이순신』과 (오른)이윤재가 동아일보에 연재한 이순신의 전기 『성웅 이순신』
이광수가 1931년 6월 26일부터 1932년 4월 3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한 「이순신」의 신문 스크랩북이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하여 노량 해전에서 전사하기까지의 해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이광수는 이순신의 내면과 감정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그를 전쟁 영웅보다는 충신이자 유능한 지도자로 그렸다. 그러나 이순신만 긍정적으로 묘사되고 지배층은 모두 부정적으로 묘사되어 '민족개조론'의 인식을 드러냈다는 비판을 받았다.
민족의 혼으로 다시 선 영웅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이순신은 '민족의 혼'으로 되살아났습니다. 신채호는 우리 민족을 살리며 우리 역사를 빛낸 위대한 인물로 평가했습니다. 전기, 소설, 신문 연재물이 잇달아 그의 지략과 신념을 상기시키며 우리 민족에게 자존과 각성을 불러일으켰습니다.
1931년 충무공 묘소 운영에 필요한 토지가 경매 위기에 놓이자 국내외 동포 2만여명이 성금을 모았습니다. 이듬해 '이충무공유적보존회'에서 현충사를 중건했습니다. 이는 일제강점기 최초의 전국적 문화유산 보존운동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광복 이후 이순신은 분단과 전쟁의 시대 속에서도 남북한이 함께 기리는 위인으로 자리잡았습니다. 그의 이름은 화폐, 우표와 훈장에 새겨졌고, 연구와 기념사업, 영화, 연극, 소설 등 대중문화 매체에서 시대를 넘어 살아있는 우리들의 표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순신 유적 보존을 위한 성금 내역을 기록한 장부
1931년 충무공 묘소 위토 경매 파문을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모금된 성금이 동아일보사로 전달된 내역을 기록한 대장이다. 총 3권에 1931년 5월 16일부터 1932년 6월 5일까지의 내역이 수록되어 있다. 성금 모금 전개 과정과 규모, 각 도별 참여 현황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기록이다.
충무공 묘소 보존을 위한 성금 편지
왼쪽부터 ① 황영소·황영희 남매의 성금 편지
서울 수송공립 보통학교 5학년 황영소(13세)와 중앙 유치원생 황영희(6세) 남매가 2년 동안 모은 저금통을 깨서 성금을 전달한 내용이다. 이후 어린이들이 저금통을 깨거나 학용품 구입비를 아껴 성금을 보내는 사례가 잇달았다.
② 아산 김동섭 성금 편지
아산군 둔포에 사는 김동섭은 충무공의 은덕에 보답하기 위하여 가난한 형편에서도 50전을 보냈다. 거북선을 민족 구원의 상징으로 여기면서 충무공과 같은 영웅이 다시 동포들을 구원하러 오기를 염원하는 마음이 잘 드러난 편지이다.
③ 일본 고베 노동자 성금 편지
일본 고베의 제분소에서 일하는 조선인 노동자들이 5일간 금연을 실천하며 모은 돈을 보냈다. 편지에는 이순신의 영혼이 천만년 평안하기를 바란다는 내용으로 이순신에 대한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다.
④ 정광수 학생이 보낸 편지
김제 보통학교 4학년 정광수가 동아일보에 연재된 이윤재의 『성웅 이순신』을 읽고 감동하여 어머니에게 얻은 돈 2원을 동생 태수의 이름과 함께 성금으로 보낸 편지이다. 신문에 연재된 이순신의 전기가 어린 세대에게까지 민족적 자긍심을 심어주었음을 보여주는 편지이다.
현충사를 중건할 때 이상범이 그린 이순신 영정
1932년 6월 현충사 중건 낙성식 때 봉안된 영정으로 이상범이 그렸다. 이상범은 이광수의 연재소설 『이순신』에 그렸던 삽화를 토대로 전해오는 구전과 문헌을 참고하여 이순신의 인품과 성격 등을 재해석한 초본을 만들었다. 무인(武人)의 느낌을 풍기는 짙은 눈썹과 치켜 올라간 눈꼬리, 굳게 다문 입 등 뚜렷한 이목구비를 한 모습으로 전립을 쓰고 구군복을 입은 차림으로 그렸다. 이상범은 현충사 영정 초본을 바탕으로 새로 건립된 한산도 제승당 영정도 제작했다. 한산도 제승당 영정은 1938년 성재휴에 의해 모사되었다.
장우성이 그린 정읍 충렬사의 이순신 영정
1962년 정읍군(현 정읍시)의 요청으로 장우성이 그려 정읍 충렬사에 봉안한 초상화이다. 이에 앞서 장우성은 6·25 전쟁 당시 충무공 기념사업회로부터 이순신 영정 제작을 의뢰받았다. 『징비록』의 '선비같은 용모' 등의 기록을 바탕으로 하고, 이순신 종손의 모습을 참고하여 영정을 그려서 아산 현충사에 봉안하였다. 정읍 충렬사에 봉안한 초상화는 현충사 봉안 초상화와 거의 흡사한 도상으로 붉은 색 관복을 입고 있고, 양식은 조선시대 공신 초상화를 따랐다. 장수의 이미지보다는 충효(忠孝)와 문무(文武)를 겸비한 선비의 모습이다.
엘리자베스 키스가 그린 이순신으로 추정되는 초상화
영국 스코틀랜드 출신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1887~1956)가 그린 조선 후기 무관의 초상화이다. 얼굴 방향 및 세부 요소, 손에 든 등채, 전립을 쓴 모습, 의자 형태 등이 이상범이 그린 이순신 영정과 유사하다. 다른 점은 배경에 <수군조련도> 병풍이 있다는 점이다. 엘리자베스 키스는 인물화를 그릴 때 배경이나 병풍으로 주인공의 신분이나 상황을 표현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이순신을 상징하는 요소로 <수군조련도>를 그렸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러한 점들을 근거로 이 초상화가 이순신을 그린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엘리자베스 키스는 1919년 3월에 처음 우리나라를 다녀갔고, 이후 1939년에 몇 차례 더 방문했다.
바다를 넘어, 세계가 기억하는 이순신
이순신이 서구에 처음 소개된 것은 1878년, 영국 외교관 윌리엄 조지 애스턴을 통해서였다. 1899년에는 미국 선교사 호머 헐버트가 거북선을 세계 최초의 철갑선으로 소개하며 이순신의 이름이 미국과 호주에 알려졌다. 이후 미국의 저술가 윌리엄 위어와 영국의 역사학자 제레미 블랙 등이 그의 전술과 지휘 능력을 높이 평가했으며, 이순신은 오늘날 세계 해전사에서 뛰어난 지휘관으로 인정받고 있다.
1899년 6월 미국 월간지 하퍼스(Harper's New Monthly Magazine)에 소개된 거북선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1949)가 미국의 월간 잡지 『하퍼스』에 기고한 글인 「한국의 발명품 Korean Inventions」에서 거북선을 소개했다. 이 글에서 "한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빼어난 민족"이라고 평가하면서 이를 가능하게 한 금속활자, 거북선, 비격진천뢰, 한글을 서구세계에 소개했다. 이 글은 서구 세계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켜 미국의 다양한 매체에 재인용되었고, 유럽과 호주에까지 알려졌다. 그가 쓴 이순신의 영문 표기 'Yi Sun-sin'은 오늘날 표준이 되었다. 이 글에 실린 거북선 삽화는 미국의 저명한 인상주의 화가 가이 로즈(Guy Rose 1867~1925)가 그린 것이다. 그림은 헐버트의 글을 바탕으로 로즈가 상상해서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함」시리즈 중 거북선 우표
마셜 제도 공화국에서 1998년 발행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함」시리즈 기념 우표이다. 그림은 영국의 일러스트 화가 브라이언 샌더스가 그렸다. 이 시리즈에는 고대 그리스의 삼단노선을 비롯해 영국 헨리 8세의 해군 기함 메리 로즈호, 영국 넬슨 제독이 1805년 트라팔가 해전 때 타고 지휘했던 빅토리호, 제2차 세계대전부터 걸프전까지 활약한 미국의 미주리호 등 전체 25척의 세계 전함을 소개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거북선은 7번째에 위치해 있다.
1967년 12월 미국『프로시딩스』에 실린 논문 「거북선의 명장」
미국 해군연구소에서 발행하는 『프로시딩스』에 실린 논문이다. 미국 해군 대령 조지 M. 해거만(1916~2010)이 쓴 이 글은 그가 미국 해군 해외 군사 원조국의 국장으로 있으면서 쓴 것이다. 미국 해군 함장으로 6·25에 참전하고 우리나라에 있던 유엔군 사령부에서 근무하면서 이순신을 발견한 뒤, 이순신의 승리가 일본의 침략을 좌절시킨 세계사적 의미가 있으나, 서구 세계에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에 주목했다. 논문에 실린 다양한 그림들은 시사만화 「코주부」를 그린 김용환(1912~1998)의 작품이다.
국내 최초의 이충무공전서 우리말 완역본과 북한에서 발행한 이순신 350주기 기념 논총과 이충무공행록도 전시되어 있다.
1) 거북선으로 도안된 휘장이 달린 해군 장교의 정모
거북선을 핵심 문양으로 한 휘장이 달린 대한민국 해군 장교의 정모이다. 두 개의 닻이 교차한 위에 거북선을 안치하고 그 위에 무궁화를 배치하였다. 거북선은 충무정신을 상징하며 대한민국 해군이 조선 수군의 역사 전통을 계승하였음을 보여준다. 이 정모 휘장은 1950년대 중반 제정되어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2) 이순신의 시호를 따서 이름지은 훈장- 충무무공훈장
대한민국 정부에서 전시 또는 이에 준하는 비상사태일 때 전투에 참가하여 뚜렷한 공을 세운 자에게 수여한 훈장이다. 정장과 약장으로 구성되었는데, 정장의 메달 앞면 중앙에는 거북선이 그려져 있고, 뒷면에는 훈장명 '대한민국 충무무공훈장'과 훈장번호 '제8258호'가 양각되어 있다.
대한민국에서 발행한 이순신 엽서, 우표와 화폐, 거북선 도안 주화 등도 볼 수 있다.
일본에서 신격화된 도요토미 히데요시 목상
예복 차림에 관을 쓰고 오른손에 홀을 들어 위엄을 갖춘 도요토미 히데요시(1537~1598) 신상의 일종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건립한 일본 오사카 성의 천수각에 있는 목상과 매우 유사하다. 작자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신으로 제사되기 시작한 이후 만들어진 상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신격화되면서부터 그에 맞섰던 이순신 장군 또한 뛰어난 해군 명장으로 인식되었다.
요즘 세대는 글보다 영상에 더 익숙한 환경이라 이 전시에서도 곳곳에서 시청각 자료를 볼 수 있다. 1958년 한국교재영화연구소에서 제작한 34분짜리 만화영화 <성웅 충무공>을 관람할 수 있다.
"이순신은 우리 민족의 태양이요, 우리 역사의 면류관이니 영원히 살아계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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